동네 주민 모임에서 낡은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기로 했는데,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제가 밑그림을 맡게 됐어요.
종이에만 그리던 사람이 벽 앞에 서니 막막하더군요. 일단 크기 감각이 전혀 달랐습니다. 가까이에서 그리면 전체가 안 보여서 몇 번 긋고 길 건너편까지 걸어가서 확인하기를 반복했어요. 하루에 걸은 걸음 수가 평소의 몇 배는 됐을 겁니다.
벽 표면이 울퉁불퉁해서 선이 마음대로 안 나가는 것도 새로웠습니다. 처음에는 짜증이 났는데 나중에는 벽의 갈라진 틈을 나뭇가지 모양으로 살려서 그렸어요. 벽이 먼저 그려놓은 선을 따라간 셈이죠.
제일 기억에 남는 건 지나가던 분들입니다. 아이들은 자기도 칠하고 싶다고 했고, 어르신 한 분은 매일 같은 시간에 오셔서 어제보다 얼마나 늘었는지 확인하고 가셨어요. 작업실에서는 절대 없는 일이라 낯설면서도 좋았습니다.
완성하고 나니 허리는 아픈데 매일 그 길을 지날 때마다 기분이 묘합니다. 내 그림이 동네 풍경이 된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싶어요.